「유씨부인 유서」는 조선 후기에 서령 유씨부인이 지은 유서이다. 한글필사본 1책이다. 이 유서는 서령 유씨부인(1807∼1831)이 남편 김응휴가 병으로 죽자, 따라 죽으면서 자신의 딸 팽아와 시부모에게 남긴 글이다. 조선시대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따라 죽는 ‘열(烈)’은 조선조 여성에게는 매우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발견된 유서는 그리 많지 않다. 「유씨부인 유서」는 분량면에서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상에 따라 내용과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이 특징적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 여인의 심정과 자세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1책. 한글필사본. 박순호(朴順浩) 소장본이 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수집한 자료((朔寧崔氏 康賢 소장 한글자료)에도 실려 있다. 이 작품의 말미에는 “병진 오월 초구일 필셔ᄒᆞ나이…… 이 ᄎᆡᆨ은 ᄌᆞᄉᆞ이 보면 슬푸기도 거지 업고 신신ᄒᆞ기도 기지 업노라”라는 필사기가 적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병진 오월은 1856년(철종 7)년, 또는 1916년으로 볼 수 있다.
이 유서는 서령 유씨부인(1807∼1831)이 남편 울산 김씨 응휴(金膺休 1806∼1830)가 병으로 죽자, 따라 죽으면서 자신의 딸 팽아와 시부모에게 남긴 글이다. 기정진(奇正鎭)의 『노사집(蘆沙集)』에 실려 있는 ‘열부유씨정려기(烈婦柳氏旌閭記)’에서는 친정 부모에게 남긴 유서도 있다고 하나,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딸에게 남긴 유서는 ① 아버지(남편)와의 혼인과 아버지의 명성, ② 아버지(남편)의 죽음, ③ 자결할 수밖에 없는 이유, ④ 딸에 대한 당부, ⑤ 남겨진 물건에 대한 처리 등 5단락으로 이루어졌다.
‘딸에게 남긴 유서’에서는 각 단락의 마지막이 한탄으로 끝나는데, 이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두고 죽어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와의 혼인과 그의 죽음에 상당 부분을 할애함으로써, 하나밖에 없는 어린 자식에게 부모의 모습을 비교적 자세히 전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족보에 의하면 유씨부인이 남긴 유일한 혈육인 팽아는, 감역(監役)을 지낸 고경명(高敬命)의 후예인 장택(長澤 : 장흥)고씨 광국(光國)과 혼인을 하였다고 한다.
‘시부모님에게 남긴 유서’는 ① 시부모의 은혜와 자기 팔자의 원통함, ② 어른들의 타이르는 말에도 불구하고 불효를 무릅쓰면서 죽음을 결심한 이유, ③ 남은 사람들에 대한 부탁, ④ 죽음을 택한 시기에 대한 설명 등 4개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시부모님에게 남긴 유서’는 당시 여성이 지켜야 할 도리를 중심으로 자신이 자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서술하고, 자신이 죽은 후 남은 사람들에 대한 부탁을 중심 내용으로 하였기 때문에 다분히 논리적이고 차분한 편이다.
‘시부모님에게 남긴 유서’ 뒤에는 ‘유서’대로 처리해 줄 것을 당부하는 글이 붙어 있는데, 내용의 대부분이 신세 한탄으로 이루어졌고, 뒷부분 약 7행 정도만이 ‘유서’대로 처리해 달라는 글로 되어 있다.
‘열(烈)’은 조선조 여성에게는 매우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생활자료 속에서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음으로써 나라로부터 정표(旌表)를 받은 여성들의 행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들이 죽기 전에 유서를 남겼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점에서 한글 필사본으로 남아 있는 「유씨부인유서」는 일단 자료의 희귀성 면에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아울러 유씨부인의 유서는 우선 분량 면에서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상에 따라 쓰고 있는 내용과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게다가 이 유서는 자신의 팔자가 박복한 것을 한탄하면서도 당시 여성들에게 지워진 도덕률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어, 조선 후기의 사대부 여인의 심정과 자세의 일단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