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 아버지는 유도문(柳道文)이며, 어머니는 김소사(金召史)이다.
1881년(고종 18)의 군제개혁과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의 창설 및 13개월치의 군료미 미지급 등으로 구식군인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그런데 1882년 6월초 전라도조미(全羅道漕米)가 도착되어 구훈련도감 군병들에게 그동안 밀린 군료가 지급되었으나 겨우 한달분이었을 뿐아니라, 겨와 모래가 섞인 것이었으며 두량도 차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포수 유복만(柳卜萬)·김춘영(金春永)·정의길(鄭義吉) 등이 주동이 되어 선혜청 고직(庫直)과 무위영 영관을 구타하고 도봉소(都捧所)를 파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선혜청당상 민겸호(閔謙鎬)는 주동자를 체포하여 포도청에 구금하였다.
그들 중 2명이 사형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되자 김춘영의 아버지인 김장손(金長孫)이 통문을 만들고, 유복만의 동생인 유춘만이 장두(狀頭)가 되어 무위 각영에 전달하여 세력을 규합하였다.
6월 9일 군민이 합세하여 척족과 중신의 집을 습격하고 대원군의 지령을 받은 다음 동별영(東別營)의 무기를 약탈하고 재수동료를 구출하였으며 일본공사관도 습격하였다. 이날 저녁 유춘만은 군졸 홍천석(洪千石)을 대동하고 군병거주마을을 찾아가 거민을 선동하여 다음날 일제히 입성하도록 태세를 갖추었다.
6월 10일 한층 강력해진 폭동군민은 영돈녕부사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 호군(護軍) 민창식(閔昌植) 등을 살해한 다음 돈화문을 거쳐 궁중에 난입, 중희당(重熙堂)에서 민겸호와 경기관찰사 김보현(金輔鉉)을 살해하고 민비(閔妃)가 탔던 사인교도 습격하였으나 민비는 무예별감 홍재의(洪在義)에 의하여 구출되었다.
이렇게 하여 군변은 마침내 대원군에 의하여 정변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7월 13일 개입한 청나라에 의해 대원군이 피납됨으로써 대원군정권은 무너졌다. 군변수습을 한 후 김장손·유복만·홍천석 등 군변관련자 8명이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나, 도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