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6책. 활자본. 평생 지은 시문을 가려 모아서 자서를 쓰고 작품을 연대순으로 배열하여 놓은 것을 그의 사후 6년 만인 1730년(영조 6)에 사위 조창회(趙昌會)와 문인 김정우(金鼎禹)가 간행하였다.
권두에 자서가 있고, 권말에 정내교(鄭來僑)의 <묘지명>이 첨부되어 있다. 저자가 자초(自抄)한 것은 총 10권으로 문(文) 42편, 부(賦) 3편, 시 1,627수였다. 간행할 때에 시를 4권 2책 더 추가하여 14권 7책이 되었다.
권1 첫머리에 부 3편이 실려 있고, 이하 권8까지 1,627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권9와 권10은 문으로서, 권9에 서(書) 2편, 서(序) 7편, 기(記) 5편, 전(傳) 3편이 있고, 권10에는 제발(題跋) 4편과 지(識) 2편, 찬(贊) 2편, 묘지명 2편, 묘갈명 2편, 소(疏) 1편, 논(論) 1편, 잡문 3편, 제문 6편, 애사(哀辭) 1편이 실려 있다. 권11에서 권14까지는 보유편으로, 홍세태가 편찬할 때에 빼놓은 것을 간행할 때에 추가한 것이다.
권1에 실린 시 중에는 30세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쓴 기행시가 많다. 부산을 떠날 때부터 대마도·적간관(赤間關)·상관(上關) 등을 거쳐 지나는 곳마다 시를 남기고 있다.
권2에 있는 시 <등남한산성서장대유감 登南漢山城西將臺有感>은 남한산성에 올라 병자호란 때의 참담함을 생각하며 삼전도(三田渡) 비문을 차마 읽지 못하겠다고 한 것이다.
권3의 <영빈사 詠貧士>는 자기 자신을 어린 봉황새에 비유하여 문장이 뛰어나지만 세속에 묻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언젠가는 천길 높이로 비상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표현하였다. 이 밖에 유명한 시로 <만월대 滿月臺>·<한식>·<제계문란시후 題季文蘭詩後>와 <영회고적 詠懷古跡> 5수, <탄금대 彈琴臺> 등이 있다.
권9에 실린 서(序)에는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하는 글이 많다. <설초집서 雪蕉集序>에서는 욕심이 적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하면서 부귀하고 세력있는 자들만이 시를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시를 짓는 데 신분의 고하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해동유주서 海東遺珠序>에 나타나 있다. 중인층의 시를 모아 편찬한 ≪해동유주≫를 공자가 편찬한 ≪시경≫에 비유하고, 공자가 이것을 보았더라도 사람이 미천하다 하여 시를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여항인의 기록을 남기겠다는 생각은 전에도 나타나 있다.
<유술부전 庾述夫傳>은 여항시인 유찬홍(庾纘弘)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재능을 가졌으나 신분이 낮아 뜻을 펼쳐보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였다.
≪유하집≫에 실린 글은 대체로 신분제의 모순에 대한 고발과 사회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인식이 담긴 것이 많다. 위항문학 발달과정상 그 선구자적 임무를 수행한 저자의 사상과 생애가 기록된 귀중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