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규(聖逵), 호는 대치(大致, 大癡)·여여(如如). 서울 출신이다.
중인인 역관의 집안에 태어나 한의업(漢醫業)에 종사하였다. 불교를 깊이 신앙했고, 사학에 조예가 깊어 역사에 통달하였다. 신체가 장대하고 변설이 유창하였다.
이웃에 살고 있던 친우 오경석(吳慶錫)이 중국에서 가져온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 등 다수의 신서들을 연구하여 국제 정세의 변화와 서양의 제도·문화를 알게 되어 오경석에 이어 1860년대에 일찍이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호 사건)을 겪은 뒤에 서세동점의 위기가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급박해졌다고 판단하였다.
오경석과 상의해 서울 북촌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을 뽑아 그들의 개화사상과 오경석이 중국으로부터 구입해 온 신서들을 교육시켜 개화파를 형성해서 나라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는 정치를 실행하게 하자고 합의하였다.
1869년(고종 6) 박규수(朴珪壽)가 평안도관찰사로부터 한성판윤으로 전임되어 상경하자, 유홍기와 오경석은 박규수에게 이 방안을 제안해 합의를 보았다. 이에 1869년 말 개화사상의 세 비조인 오경석·유홍기·박규수는 개화사상의 동지로 완전히 결합하였다.
1870년 초부터는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박영교(朴泳敎)·김윤식(金允植)·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유길준(兪吉濬)·서광범(徐光範) 등 다수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에게 개화사상을 교육하였다. 1874년부터는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당파로서의 초기 개화파(개화당)가 형성되었다.
유홍기는 박규수·오경석과 더불어 초기 개화파의 스승이며 지도자가 되었다. 강화도조약 이듬해인 1877년에 박규수가 죽고, 또 1876년 4월에 오경석이 병석에 누웠다가 1879년에 죽었다. 개화사상의 세 비조 중에서 유홍기만이 남아 청년 개화당들을 지도하였다.
유홍기의 직접적 지도를 받은 인물은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백춘배(白春培)·정병하(鄭秉夏)·이종원(李淙遠)·이정환(李鼎換)·박제경(朴齊絅)·이동인(李東仁)·탁정식(卓挺植) 등이었다. 김옥균은 유홍기의 지도와 영향으로 불교를 신앙하게까지 되었다.
유홍기가 당대의 최고 선각자이고, 당대의 뛰어난 청년 개화당들이 모두 유홍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유홍기를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불렀다. 개항 후 초기 개화파들이 점차 정계에 진출하고 정부에서도 개화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행정기구를 개편하고 정리하기 위한 임시 기관으로 1882년 감생청(減省廳)을 설치해 어윤중(魚允中)이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유홍기는 중인 출신이었지만 이 기관의 부사용(副司勇, 五衛의 종9품직)에 임명되었다가 곧 사용(司勇, 정9품직)으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관말직은 유홍기의 경륜과 능력에 비추어 보면 너무 보잘 것 없는 직책이었다. 그나마도 감생청은 수구파의 반대로 1년 만에 폐지되어 유홍기는 관직에서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임오군란 후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 서울에 상주시키고, 이를 배경으로 조선의 자주개화정책을 반대하고 내정 간섭을 자행하면서 조선을 실질적인 속방으로 만들려 하였다.
또 새로이 러시아가 북방으로부터 압력을 가해 왔다. 이렇게 되자 유홍기는 자주독립과 개화자강을 위한 방책을 김옥균·박영효·서광범·윤치호(尹致昊) 등 청년 개화당들을 통해 국왕에게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
그러나 친청수구파들의 방해로 개화혁신 정책은 채택되지 않았다. 나라는 날로 청나라의 지배 하에 들어가고 있었다. 마침 안남문제로 청불전쟁의 전운이 감돌아 서울에 주둔한 청군이 반으로 감축되었다.
1884년 9월에는 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기회로 포착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여 개혁정치를 단행하고자 하였다.
또 마침 주조선 일본공사가 1884년 10월 30일 귀임한 뒤 정책을 바꾸어 개화당에 접근해오면서 정변을 위한 자금과 일본공사관 호위병을 빌려줄 의사를 보였다. 유홍기는 일본의 힘을 이용해서 개화당의 부족한 힘을 보충해 정변을 일으킬 것을 개화당 제자들에게 권고하였다.
유홍기의 지도를 받은 김옥균 등 개화당은 1884년 12월 4일 마침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은 수구파 지도자들을 처단하고 신정부를 수립하여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 실시를 위한 혁신정강(革新政綱)을 공포하고 대대적인 혁신정치를 시작하려 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군의 개입과, 정변에 개입한 일본군의 배신, 그리고 국민의 지지 결여로 12월 6일 실패함으로써 개화당의 신정부는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박영교 등을 비롯한 수많은 개화당 인사들이 청군과 수구파에게 참살당하였다. 유홍기는 갑신정변의 실패를 알고 12월 6일 밤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뒤 유홍기의 행방에 대해 온갖 이야기가 떠돌았다. 10년 후 갑오경장 때 유홍기의 제자들이 집권해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갑신정변의 지도자들을 모두 복권시켰을 때에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1908년 개화파 인사들이 애국사사추도회(愛國死士追悼會)를 열었을 때에 유홍기를 순국한 애국자로 추도한 것을 보면, 유홍기는 갑신정변 실패 직후 수구파들이 재판 절차 없이 개화당 인사들을 닥치는 대로 참살할 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