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고종 26)∼?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재학중이던 1909년 1월변희준(邊熙駿)·장순익(張淳翊)·유동수(柳東秀)·윤교중(尹敎重)·어윤빈(魚允斌) 등과 함께 동경유학생들로 구성된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를 조직, 학회내에 운동부를 두어 동경유학생들의 체육활동을 통한 단합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하계방학을 이용하여 일시 귀국, 25명의 대한흥학회 운동부원들과 함께 운동부장으로서 서울의 각 학교에서 운동을 지도하였다. 대한흥학회 운동부는 순수 학생들만의 단체였으며, 운동단체의 활동을 통하여 민족애를 높인 대표적 집단이었다.
1920년 6월 인사동 명월관 지점(전의 태화관)에서 열린 조선체육회(朝鮮體育會) 발기인회에서 창립준비위원으로 선발되었으며, 조선체육회 초대 이사로서 대한체육회의 발전에 발아적 구실을 하였다. 또한, 전조선야구대회와 전조선경기대회의 야구심판으로 활약하는 등 국내 야구발전에도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