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길구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내부협판, 궁내부특진관, 봉상사제조 등을 역임한 관료.
이칭
의경(宜卿)
혜원(惠園)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3년(철종 4)
사망 연도
1906년(광무 10)
본관
해평(海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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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내부협판, 궁내부특진관, 봉상사제조 등을 역임한 관료.
개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의경(宜卿), 호는 혜원(惠園). 이조판서 윤치정(尹致定 )의 손자이고, 홍문관학사 윤우선(尹宇善)의 아들로 윤최선(尹𪧨善)에게 입양되었으며, 어머니는 이인기(李寅起)의 딸이다. 조병식(趙秉式)이 고모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혜를 받아 1876년(고종 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부수찬·집의를 거쳐 1889년에는 소론의 입장에서 송시열(宋時烈)을 비난한 한용석(韓容奭)을 규탄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권당(捲堂)이 있은 뒤에 대사성이 되었다.

1891년에는 지석영(池錫永) 사면조처에 반대하는 대간들의 상소가 연이어 올라오자 대사간에 임명되었지만, 그 역시 같이 상소하였으므로 곧 교체되었다. 그러나 다시 대사성·대사간·우승지를 천임하였고, 1893년 동학교도들이 교조신원을 위하여 복합상소하자 대사간으로서 동학을 엄금할 것을 상소하여 왕으로부터 그 대책을 강구하라는 답변을 얻었다.

갑오경장으로 신식제도가 시행되고, 불필요하다고 보이는 관원들이 대거 퇴직당할 때 관계에서 일시 물러났다. 그러다가 수구세력이 재등장한 직후인 1896년에 동학교도와 도둑으로 여전히 소란하던 황해도의 해주부관찰사로 임명되었지만, 아버지의 나이가 80세라고 사직하고 개성부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영선국장으로 원구단(圓丘壇) 조성을 맡았고, 궁내부특진관·봉상사제조·경효전제조 등 왕실의 전례·의식에 관련된 직책을 맡았다. 1900년에는 황해도와 충청북도 관찰사가 되었고, 다음해에는 농상공부와 내부의 협판을 잠시 지낸 뒤 궁내부특진관·봉상사제조를 지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해평윤씨대동보(海平尹氏大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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