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사술(士述). 윤언명(尹彦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득의(尹得義)이다. 아버지는 윤정동(尹鼎東)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慶州金氏)로 대사간과 관찰사를 지낸 김성운(金聖運)의 딸이다. 부인은 이징규(李徵奎)의 딸이다.
1759년(영조 35) 성균관학생으로 있을 때 궁궐에서 왕이 직접 시행한 제술시험에 장원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혜택을 받았다. 1761년(영조 3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에 선발되었고, 세자시강원설서·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홍문관부수찬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64년(영조 40) 부수찬으로 있을 때 임금의 재계 중에 동료들과 소란을 피우다가 함께 갑산부로 유배 명을 받았으나 곧 서용되었다. 1765년(영조 41) 6월에는 임금이 진전(眞殿: 璿源殿(선원전)의 다른 이름으로 역대 왕의 초상화를 모셔두었음.)에서 재계하고 있을 때 공복을 벗고 부채질을 하다가 김포군으로 유배되었다.
다음해 서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보덕, 홍문관교리·수찬·부응교,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고, 1773년(영조 49)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1783년(정조 7) 호조참의를 지내고, 다음해 진하 겸 사은사(陳賀兼謝恩使)의 부사로 북경에 가서 건륭(乾隆) 황제가 직접 거행하는 석전(釋奠)과 경전의 강론을 참관하였다.
1785년(정조 9) 이후 오랫동안 대사헌을 지내면서 홍국영(洪國榮)의 잔당들과 왕족 이담(李湛)을 숙청할 것을 주장하였다. 1788년(정조 12)에는 강화부유수로 재직 중 방비 소홀로 왕족 죄인 이인(李䄄)이 탈출하자, 정순왕후(貞純王后)로부터 처형하라는 명을 받았고 대신들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정조의 비호로 파직에 그쳤다. 사후 1801년(순조 1) 정순왕후의 명으로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