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술(子述), 호는 청봉(晴峰).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윤훤(尹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윤은필(尹殷弼)이다. 아버지는 감찰 윤홍언(尹弘彦)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장림수(長臨守) 이순민(李舜民)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 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1년 사간원정언으로 있을 때, 대사헌 이이(李珥), 장령 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심의겸(沈義謙)을 탄핵하였는데, 그 때 정철(鄭澈)의 탄핵문제까지 아울러 거론되자 이에 대하여서는 이이가 반대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이를 논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신창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간원사간으로서 무유어사(撫諭御史)·선유사(宣諭使)·조도사(調度使) 등의 임시관직을 맡아 국난극복을 위하여 활약하였고, 1594년 충청도관찰사에 이어 형조참의·호조참판·대사헌 등을 거쳤다. 1597년 형조판서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다음 이조판서에 올랐다.
1599년 함경도관찰사 재직시 변방의 여진족이 쳐들어와 크게 난을 일으키자 병사 이수일(李守一)을 시켜 적의 소굴을 소탕함으로써, 어유간(魚游澗)에서 풍산보(豊山堡)에 이르는 함경도일대에 여진족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하였다.
그 뒤 1601년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영의정에까지 승진하였다. 영의정으로 있을 때 선조의 존호제정문제로 좌의정 유영경(柳永慶)의 모함을 입고 파직당하였으나 곧 신원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