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주빈(周賓), 호는 석촌(石村)·해관(海觀)·수간(睡幹)·장위산인(獐位山人). 남녕위 의선(宜善)의 아들이다. 1871년(고종 8) 직장(直長)으로서 문과에 등제하여 벼슬이 예조·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법부·탁지부·내무부 등 대신에 십수회 배명(拜命)받았지만 취임하지 않고 서울 근교의 장위산에 은거하면서 ‘장위산인’이라 자호하였다.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에서 남작을 수여하였으나 거절하고 서화와 거문고, 바둑으로 자오(自娛)하며 두문불출, 세사를 멀리하였다.
글씨는 해서·행서를 많이 썼으며 그림은 난과 대를 잘 그렸다. 금석문으로 과천의 「문간공한장석신도비(文簡公韓章錫神道碑)」와 광주(廣州)의 「선성군무생이공신도비(宣城君茂生李公神道碑)」가 있으며, 전라남도 순천 선암사 입구의 강선루(降仙樓) 현판 등을 남겼다.
한편, 그림으로는 「죽도(竹圖)」(개인소장)와 「묵죽(墨竹)」(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한국서예백년전에 출품된 행서 작품을 보면 특징있는 자기의 필치는 이루었으나, 강약의 변화를 구하는 데 있어서는 무리가 있어 부자연스럽고 행의(行意)의 수필처(收筆處)의 획들에도 군더더기가 생긴 곳이 많아 격이 높지는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