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가고(可沽), 호는 고불(沽弗). 아버지는 현감 윤지하(尹志夏)이다. 어머니는 장흥고부사(長興庫副使) 이주(李紬)의 딸이며, 부인은 여산군수(礪山郡守) 최철석(崔哲石)의 딸이다.
1483년(성종 14)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 1488년 예문관대교를 거쳐, 1493년 사헌부지평에 승직하였다. 곧 체직되었다가 1494년(성종 25)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으며, 곧 삭령군수(朔寧郡守)로 파견되었다.
1497년(연산군 3) 삭령군수로서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03년 청주목사(淸州牧使) 재임 중 선정으로 체임시에 승서(陞敍)하도록 조치되고, 1505년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면서 승정원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이 후 연산군대에 우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506년(중종 1)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정2품 자헌대부에 오르면서 행우승지에 제수되고 양성군(楊城君)에 봉군되었다. 그러나 곧 ‘정2품자가 승지에 재직함은 합당하지 못하다’는 중론에 따라 체직되었으며, 1509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제수되었다.
1514년 대간(臺諫)으로부터 “반정(反正)일에 승지로서 궐내에 직숙하던 중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화를 피하기 위해 국왕에게 정세를 살피고 오겠다고 하면서 근무지를 이탈한 뒤 궁내의 배수구를 통해 궐밖으로 탈출한 불충한 인물이다.”라고 탄핵되면서 공신호를 박탈당하였다. 묘는 경기도 파주시 남면(南面) 진전리(榛田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