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사익(士益). 할아버지는 윤동명(尹東鳴)이고, 아버지는 정언 윤혼(尹焜)이다. 부인은 경주최씨(慶州崔氏)로 최익수(崔益秀)의 딸이다.
1750년(영조 26) 온양에서 거행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56년(영조 32)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장령 등을 지내면서 당시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사도세자에게 학문 정진과 정사에의 근면 및 시강원 관원들의 기강확립을 여러 차례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사후로 추정되는 1792년(정조 16)에 사간 유성한(柳星漢)이 왕에게 학문 정진과 간언을 상소한 내용 가운데 사도세자에게 저촉된 사건이 일어나 유생들과 대간들의 탄핵을 받자, 윤재겸도 당시 세자를 비난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윤재겸은 일찍이 관로가 좌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가졌던 정조에게는 사도세자에 대한 비판을 가했던 신료들의 간언(諫言: 충심으로 우러나는 바른 말)이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윤재겸은 아마 벽파(僻派)의 전신인 노론계의 남당(南黨)의 위치가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