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우(季愚), 호는 침계(梣溪). 이조판서를 지낸 윤행임(尹行恁)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성균관에서 행한 특별시험 황감응제(黃柑應製)에 뽑혀, 1843년 식년문과 전시에 직부, 급제하였다.
51세의 나이로 늦게 출사하였으나 이듬해 규장각대교에 뽑혀 들어간 뒤 학문·문장의 조예와 가문적 배경으로 인하여 급속히 승진하였다. 2년 뒤인 1846년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정월 재신(宰臣)의 반열에 올라 홍문관제학을 역임하고, 1848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년 만인 1849년 2월 병조판서가 되었다.
과거급제 후 6년만에 판서에 오른 것이다. 이후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두루 거치고, 1856년(철종 7) 9월 판의금부사를 겸직하였으며, 11월에는 규장각제학이 되었다. 판서가 된 뒤 줄곧 비변사당상관을 겸임하였는데, 특히 호남구관당상을 오래 지냈다.
1858년 이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판돈녕부사 등의 명예직에 임명되었다가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여 그 덕망이 널리 알려졌고, 경사(經史)에 박식하고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비문에 능하였다. 문집으로 『침계유고』가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