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평안도관찰사,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유린(幼麟)
양강(楊江)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56년(효종 7)
사망 연도
1718년(숙종 44)
본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주요 관직
세자시강원설서|사헌부지평|이조정랑|홍문관교리|평안도관찰사|예조참판|대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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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평안도관찰사,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유린(幼麟), 호는 양강(楊江). 공조좌랑 윤업(尹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윤민헌(尹民獻)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윤강(尹絳)이며, 어머니는 유익(柳杙)의 딸이다. 형제 정승을 지낸 윤지선(尹趾善)·윤지완(尹趾完)의 아우이다. 부인은 판중추부사 이정영(李正英)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94년(숙종 2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96년부터 세자시강원설서, 사헌부지평, 문학을 지냈다. 그 해 홍문록에 올라 홍문관부수찬·교리, 시강원사서 등을 역임하고, 다음해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돌아와 사헌부지평, 교리·수찬·정언·헌납·이조정랑을 지냈다. 다시 홍문관교리가 되어 후궁의 수가 많고 은전이 과도하며, 궁중의 사치가 심한 것을 간쟁하였다.

1701년에는 단천의 폐광된 은광에 세금을 징수하는 폐단을 논해 시정하였다. 이 후 사간·집의·교리·사인 등을 거쳐 특명으로 당상관인 승지에 발탁되었다. 이 때 서원의 지나친 설립을 금지하도록 건의하였다.

그 해 9월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사약을 받을 때 숙종에게 명을 거둬들이도록 힘써 간쟁하고, 세자의 보호와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張希載)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숙종의 노여움을 사, 관직이 삭탈되고 문외출송(門外出送: 4대문 밖으로 쫓겨남)되었다.

1703년에 다시 서용되고, 1706년 이후 부제학·승지·대사간·대사성·이조참의를 거쳐, 1708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710년 부제학·예조참판·평안도순무사·대사헌·이조참판 등을 지내고, 1712년 동지사 겸 사은사의 부사로 북경을 다녀왔다.

다음해 특명으로 판윤으로 승진하고, 1715년에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 때 궐문에 괘서가 붙어, 윤지인과 최석항(崔錫恒) 등 9인이 모반했다고 무고되었으나 왕이 불문에 부쳤다.

다음해 제도민호군역구관당상(諸道民戶軍役句管堂上)에 임명되어 전국의 군역 변통을 담당하였다. 그 해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안산에 다녀온 일로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었다. 청백으로 이름이 있었고 소탈했으나, 소론 명문 출신으로 자주 노론측과 갈등을 빚었다 한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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