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 윤석보(尹碩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문형(尹文亨)이다. 아버지는 우봉현령 윤이(尹伊)이며, 어머니는 김윤선(金胤先)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5년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승정원주서를 거쳐 1568년(선조 1) 전적·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천추사(千秋使)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홍문관수찬이 되어 지제교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임했으며, 『명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57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사헌부지평·장령·교리·검상·사인 등을 역임하고, 이듬 해 외직으로 동래부사·상주목사를 지내면서 선정으로 치적을 남겼다. 1580년 좌승지·도승지·예조참판을 지내고, 1582년 영남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왕이 윤탁연의 재능을 믿고 경상도관찰사로 특채하였다.
이듬 해 형조참판으로 형조에서 죄인을 다스릴 때 임산부를 장형(杖刑)에 처해, 낙태해 죽게 한 책임을 지고 좌천되었다가 1585년 경기도관찰사에 올랐다. 그 뒤 한성부판윤에 승진하고 세 차례의 형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냈다.
159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칠계군(漆溪君)에 봉해졌으며, 특히 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북으로 가던 도중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었다.
그 때 함경도 지방에는 이미 적이 육박했으며, 함경도에 피난한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회령에서 북변 반민(北邊叛民)과 적에게 아부한 무리들에 의해 적의 포로가 되자, 조정은 근왕병(勤王兵)을 모아 적을 격퇴시킬 계획을 세웠다.
윤탁연은 왕의 특명으로 함경도도순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에 대한 방어 계획 등 시국 타개에 노력하다가 그곳에서 객사하였다. 송익필(宋翼弼)·이산해(李山海) 등과 팔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함흥의 창의사(彰義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계사일록(癸巳日錄)』이 있다. 시호는 헌민(憲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