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탄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동지중추부사, 충청도관찰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주요 관직
낭청|제천현감|종부시|우부승지|형조참의|동지중추부사|충청도관찰사|판돈녕부사
관련 사건
갑자사화
정의
조선 전기에, 동지중추부사, 충청도관찰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탕보(蕩甫).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윤삼산(尹三山)이고, 어머니는 좌의정 이원(李原)의 딸이며, 부인은 관찰사 이효장(李孝長)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문음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1470년 오위부사과(五衛副司果)로서 명사를 접대하는 분예빈시(分禮賓寺) 낭청에 선임되고, 곧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이후 제천현감·천령현감·성천도호부사·내섬시(內贍寺)·내자시(內資寺)·사도시(司䆃寺)·종부시(宗簿寺)의 정(正)을 두루 지냈다.

1488년(성종 19) 통례원우통례(右通禮)를 거쳐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였다. 1489년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발탁되고, 이어 우부승지, 형조참의를 지냈다. 1492년(성종 23) 종2품 가선대부에 오르면서 우윤(右尹)에 제수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와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總管)을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이 때 대간(臺諫)이 “성격이 거칠고 재주와 식견이 부족해 관찰사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탄핵했지만 성종의 옹호로 부임하였다. 그뒤에도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이런 대간의 탄핵과 성종의 옹호가 반복되었다.

1494년(성종 25) 첨지중추부사로 입조하고, 이듬 해 겸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에 제수되었으며, 지의금부사 겸 경연특진관(知義禁府事兼經筵特進官)에 교체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었으나, 곧 대비(大妃, 성종비 貞顯王后)의 숙부라하여 사면되고 동지중추부사에 서용되었다. 1505년(연산군 11) 정2품 자헌대부에 초자(超資)되었다.

1506년(중종 1)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종1품 숭정대부에 오르면서 판돈녕부사에 제수되고 영성군(鈴城君)에 봉군되었다. 1519년(중종 14)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주도한 위훈삭제(僞勳削除)에 따라 공신적이 박탈되었다가 조광조 일파가 몰락하자 공신적을 회복받았다.

왕실의 외척으로 장기간 재상직에 있었지만 학식이 짧아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한다. 시호는 정호(丁胡)이다. 묘는 경기도 과천시(果川市) 수리산(修理山)에 있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파평윤씨족보(坡平尹氏族譜)』
집필자
한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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