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출신. 1910년 일제가 주권을 강탈하자 연해주(沿海州)로 망명, 니콜스크를 근거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7년 전로한족중앙회(全露韓族中央會)를 결성하고 부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회의 기관지인 『청구신문(靑邱新聞)』의 주필로서 민족의식함양에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국내에서 결성된 한성정부(漢城政府)의 평정관(評定官)으로 선임되었고, 노령(露領)에서 조직된 국민의회(國民議會)의 대표로 고창일(高昌一)과 같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파리로 향하였다.
2월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였으나 소련의 국내사정이 혼란하여 이를 피해 시베리아와 소련의 북부, 노르웨이·영국을 거쳐감으로써 강화회의가 끝난 9월에야 프랑스에 도착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1922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에 참가하여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