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중문(仲文). 아버지는 윤해(尹侅)이다.
1373년(공민왕 22) 판사로 재직시 왕과 내기바둑에 져 고시(古詩)를 짓게 되었다. 그 시는 “남몰래 속이는 것도 아니되는데, 밝은 데에서 속이면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손[手]을 가지고는 천하의 눈을 가리기 어렵다.”라는 것으로, 왕은 이것이 자신을 풍자한 것이라 하여 윤호를 멀리하고 뒤에는 양광도도순문사로 보냈다.
1375년(우왕 1) 이인임(李仁任) 탄핵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1381년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왜구를 소탕하였다. 1385년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88년 요동정벌 때는 이성계(李成桂) 휘하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활약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위화도회군과 공양왕 옹립의 공으로 회군공신에 책록되고, 1392년 찬성사가 되었다. 이 해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공신 2등이 되어 파평군(坡平君)에 봉하여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으며,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던 도중 금암역(金巖驛)에서 병사하였다.
근검하고 국방과 행정에 모두 뛰어났다.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후(靖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