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거경(巨卿). 윤격(尹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효술(尹孝述)이다. 아버지는 사헌부장령을 지낸 윤형(尹珩)이며, 어머니는 이지원(李智遠)의 딸이다. 부인은 이문계(李文啓)의 딸이다. 형제가 모두 13명이나 되었다.
진사로서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84년(숙종 10) 정언에 임명되어, 군덕의 함양과 요역의 줄임 및 조정의 기강확립을 주청하여 칭찬하는 임금의 답변을 받았다. 노론의 재사로서 1682년에 있었던 이른바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 사건에서 김익훈(金益勳)과 김환(金煥)을 두둔한 일로 1684년에 승지 송광연(宋光淵)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자 서용되어 정언·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장령으로 있을 때 소론의 공격을 받고 있던 김춘택(金春澤)을 두둔하였다가 비난을 받았다. 1698년 청의 강희(康熙) 황제가 동북지방을 순행하자, 문안사의 서장관이 되어 심양을 다녀왔다.
다음해에는 사헌부장령으로서 궁가의 농지 절수(折受: 떼어서 차지함.) 폐단을 극론하고, 그 혁파를 주장하였다. 다음해 과거시험장의 부정사건이 발생하자, 소를 올려 책임자였던 소론 오도일(吳道一)을 탄핵하였다.
1701년(숙종 27) 사간원헌납·세자시강원필선을 지내고, 장령·집의로 있을 때 세자의 외숙인 장희재(張希載)를 구원하려던 최석정(崔錫鼎)·남구만(南九萬)·유상운(柳尙運) 등 소론 중신들을 극렬히 비판하였다. 정언, 세자시강원보덕을 거쳐, 다시 집의가 되었다가 1703년 특명으로 당상관에 승진하여 승지에 제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