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책. 인본. 은봉은 그의 호이며 우산(牛山)이라고도 하였다. 박광전(朴光前)·박종정(朴宗挺)에게 수학, 16세 때 향시에 나갔다가 그 분잡함을 보고 과거에 뜻을 끊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1591년(선조 24) 그의 나이 19세 때 파주로 성혼(成渾)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을 따라 창의하였다. 이 때 체찰사(體察使)로 있던 정철(鄭澈)을 공주에서 만나 칭찬을 받았다. 1611년(광해군 3) 가족을 거느리고 상경했으나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 정권의 실정을 보고는 다시 낙향, 우산 밑에 복거(卜居)하면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평소 정몽주(鄭夢周, 호는 圃隱)와 조헌(趙憲, 호는 重峯)을 숭앙한 나머지 그들의 호에서 한자씩 취해 당호를 은봉(隱峯)으로 하여 그들의 절의를 경모하였다. 이러한 절의를 숭상하는 그의 뜻이 그의 저술에서도 일관되었다.
이 책은 1663년(현종 4)전라도 흥양현(興陽縣) 향교에서 간행했으며, 1850년(철종 1) 일본 사람 와타나베(渡邊)가 흥양본을 일본에서 번각(飜刻)한 것도 있다. 내용은 <임진록 壬辰錄>·<노량기사 露梁記事>·<진주서사 晉州敍事>의 3편으로 되어 있다.
<임진록>은 1592년 4월 왜군이 침입한 이래 1개월간 조야의 사정을 약술한 것으로, 조헌이 의병을 모아 항전한 경위를 기술한 것이다. 처음부터 조정에서 그를 규제하려고 하였던 일 등을 썼다. 또 후기에서 조헌의 절의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소인배에게 모함되는 것을 개탄하고 있다.
<노량기사>는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노량에서 왜병을 맞아 대승한 끝에 전사한 경위를 기술한 것이다. <진주서사>는 임진왜란 2년째인 1593년 6월 왜적이 진주를 함락시키게 되기까지의 항전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진주의 전투를 목격한 임둔화(林遁華)의 진술을 근거로 작성된 것이다.
김천일(金千鎰)의 시신에서 일본과의 화의(和議)를 반대하는 칠언십칠운(七言十七韻) 장시(長詩)가 발견되었다는 기록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또, 이 책에 수록된 3편의 임진 관계 야사는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규장각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