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복에 차는 노리개의 하나이다. 남녀가 장도를 차는 풍습은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한 뒤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에는 널리 일반화되었다. 1498년(연산군 4)의 사치금제에서도 서인의 은장도 사용을 금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아서, 1670년(현종 11)에는 유생 잡직 및 서인남녀 중 은장도 차는 자를 논죄하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금과 은의 사용이 봉건사회에서 상하·존비·귀천을 가리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명나라에 금·은의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한 조처로 취해진 것이었다. 여인에 있어서 은장도는 장식용으로 뿐만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호신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즉, 임진왜란 당시 항상 작은 장도를 지니고 있다가 유사시에 자결 혹은 상대를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있다. 부녀자들이 장도를 노리개로 옷고름에 차면 패도(佩刀)라 하고, 주머니 속에 지닌 것은 낭도(囊刀)라 한다.
패도의 크기는 큰 것은 전장 5촌, 도신(칼날) 3촌 정도이고, 작은 것은 전장 3촌, 도신 1.5촌이며, 낭도는 전장 3촌, 도신 1.5촌 크기가 보통이었다. 은장도의 재료는 은이고 도신은 강철이며, 도신에 일편단심이라는 글씨를 문양화하여 새기기도 하였다.
또, 은젓가락이 달려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외부에서 식사하게 되는 경우 젓가락으로 사용하고, 또 음식 중의 독의 유무를 분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