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망천(忘川).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사람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1389년(공양왕 1) 집의에 오르고 한림학사·집현전직제학을 지냈다.
뒤에 사직하고 수원의 광교 남탑산(光敎 南塔山)에서 살았다.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즐기는 바가 무엇인가 물으니 이고는 자신이 사는 산천을 극구 칭찬하였는데, 그 말 중에 사통팔달하여 막힌 데가 없다는 말이 있었다.
1392년 조선 건국 후 삼사좌승(三司左丞)·경기우도안렴사(京畿右道按廉使)로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태조가 화공에게 이고가 거처하는 곳을 그리게 하고 그곳을 팔달산(八達山)이라고 하였다. 세종 때에 석비를 그 마을 입구에 세워 ‘고려효자 한림학사 이고(高麗孝子翰林學士李皐)의 비’라고 하였다.
대개 조선에 벼슬하지 않은 8명의 학사를 팔학사(八學士)라고 칭하는데, 이고는 그 중 조견(趙狷)·이집(李集)과 가까이 살면서 때때로 소를 타고 내왕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