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풍(咸豐)·함평이씨(咸平李氏) 시조이다.
1314년(충숙 1) 4월 상호군으로서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연호를 고친 것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충숙왕이 즉위하자 얼마 동안은 상왕인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국가의 모든 일을 전지(傳旨)로써 행하였는데, 권한공(權漢功) · 채홍철(蔡洪哲) · 최성지(崔誠之) 등과 더불어 상왕을 보좌함을 기화로 매관매직 등 악행을 일삼고 공부(貢賦)를 균등하지 않게 매겨,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듣고 충숙왕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1319년 2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4월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랐다. 1321년 충선왕이 티베트[吐蕃]로 유배되자 드디어 충숙왕이 권한공 · 채홍철과 함께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매를 때려 섬으로 내쳤는데, 섬으로 가지 않고 홍주(洪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 경계에 모여 다니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 문제로 충숙왕을 원망하여 민지(閔漬) · 권한공 · 채홍철과 더불어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暠)의 심복이 되었으며, 심양왕을 왕으로 추대하는 일에 앞장서서 백관들로 하여금 원나라 중서성에 올릴 글에 서명하기를 재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324년 4월 삼사사(三司使)의 직을 맡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