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 문과도사 이시암(李時馣)의 손자로 아버지는 이후룡(李後龍)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이다. 백부 이선룡(李先龍)의 양자로 갔다.
증조부 이택(李澤)이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을 피해 안동부 내성현으로 내려오면서부터 살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정통 유학서 뿐만 아니라, 『장자(莊子)』·『초사(楚辭)』·『사기(史記)』·『좌씨춘추(左氏春秋)』와 같은 책을 탐독하여 고문에 능하였으며 훌륭한 문장을 많이 지었다.
1699년(숙종 25)에 진사가 되었으나, 생부모와 양부모 상(喪)을 연이어 당하자,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태백산 자락 소천산(小川山)으로 들어가 젊은이를 가르치면서 문장가로서의 일생을 보냈다.
만년에 조현명(趙顯命)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방의 학문과 교화를 일으키고자 많은 선비를 뽑았는데, 이 때 이광정을 스승으로 모셔 안동부도훈장(安東府都訓長)으로 삼았다. 조정에서 효렴(孝廉)을 천거하라 하였을 때에도 문학과 행의(行誼)가 산남(山南)의 제일이라고 하여 천거되었다.
이후에 김재로(金在魯)가 영백(嶺伯)으로서 조정에 들어갔을 때에도 천거하여 후릉참봉(厚陵參奉)을 제수(除授)받았는데, 서경덕(徐敬德)과 성수침(成守琛)이 그 자리를 사양하였음을 알고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그 뒤에도 장릉참봉(莊陵參奉)을 제수 받았지만 끝내 사양하였다.
당시 재상이던 조영국(趙榮國)은 이광정이 문장과 학술에 중망이 있었음에도 여러 차례의 관직 제수를 사양하고 산림에 묻혀 후학을 교수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6품직 하사를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얻었다. 이와 같이 이광정은 영남 문원(文苑)의 모범이며, 세교(世敎)를 떨쳤던 인물로 알려졌다.
문집으로는 『눌은집』이 있다. 그 가운데 「노파의 다섯가지 즐거움」을 비롯한 21편의 우언(寓言)이 담긴 『망양록(亡羊錄)』과 「강상여자가」·「향랑요」 등 주목할 만한 작품이 많다.
퇴계학풍이 지배적인 안동 지방에서 제자인 문장가 권만(權萬)과 도학자 이상정(李象靖) 간에 문학사상 논쟁이 벌어졌을 때, “문학과 도학 중 어느 것이 중하다 가볍다 할 수 없다.”고 하여 문학의 자율적 가치를 옹호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