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안식(安植), 호는 금재(錦齋)·연해(淵海)·용섭당(龍攝堂). 호적명은 준수(準水).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礻+甫)의 17대손으로, 이영의(李榮儀)의 아들이다. 전라남도 광산(지금의 광주광역시) 출신이다.
일찍이 한학을 익혔고, 20세 때는 역리와 천문·지리에도 통달하였다. 명성황후시해사건·을사조약·한국군군대 해산 등 일제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광산·나주 등지에서 800여 명의 의병을 모은 뒤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진도·완도 연안의 일본군을 물리쳤다.
그 뒤 장성의 기삼연의진(奇參衍義陣)의 부장인 전해산(全海山)·김태원(金泰元)과 모의해 광산·나주·함평 일대의 상본장(相本將)이 되어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총 500정을 가지고 의병대를 편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2월 용진산전투(龍鎭山戰鬪)에서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하고 총 100여 정을 빼앗았으며, 이어서 전개된 전투에서 다시 적군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 뒤 용진산보다 지형이 유리하고 군량미 조달이 쉬운 성문산(城門山)으로 본진을 옮겨 담양 등지로 원정,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1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무안군 지도(智島)에 설치한 일본 해군본부를 습격, 일본군을 완전히 섬멸하였으며,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노감촌과 고산 등지로 출병하여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그 뒤 고창 극오동과 노동 작전에서 결사전을 전개하였으나, 화력과 병력이 부족해 의병의 피해가 적지 않자 잠시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9년에 다시 거의하였으나 2월에 사촌(沙村)에서 패하고, 전해산 의진과 동맹하여 호남 제7진의 의병장으로 활약중 적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압송하던 병졸이 술을 마시고 취한 틈을 이용해 결박을 풀고 탈출하여 금산에서 은신하였다.
그 뒤 함경도를 거쳐 만주·러시아·연해주 지방으로 망명하였다가 1915년 러시아에서 귀향하여 금산에서 젊은이들에게 애국정신을 일깨워 주었고, 고종과 순종을 모신 숭봉전(崇奉殿)과 어필각(御筆閣)을 지어 널리 민족정신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