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정기(李正己)는 765년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전역을 지배하는 평로치청절도관찰사겸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兼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가 되었는데, 그는 젊어서부터 아버지를 도왔으며,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였던 이보신(李寶臣)의 딸과 혼인하여 절도사 간의 동맹체제를 굳히는 데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777년 12월 아버지가 번진(藩鎭)의 치주(治州)를 청주(靑州)에서 운주(鄆州)로 옮김에 따라 그는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임명되었고, 뒤에 조주자사(曹州刺史)로 전임되었다가 781년 8월 아버지가 죽자 이듬해 정식 절도사 자리를 계승하였다.
절도사가 된 직후 조정의 번진제압정책에 대항하여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이희열(李希烈)과 연결, 정부군의 거점인 변주(汴州)를 공격하고 강회(江淮)의 조운선의 북상을 차단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절도사로 있는 동안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켜 통치기반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소금·철·주석·견직물의 생산을 꾀하는 한편, 신라·발해와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서 꾸준히 경제력을 강화해갔다. 그 결과 그의 번진은 당시 여러 번진 중에서 최대의 강성을 자랑하였으며, 조정에 대해서는 거의 독립적인 태도를 취하여 마치 소왕국과 같은 존재로 군림하였다. 792년 5월에 35세로 죽자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뒤를 이어 절도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