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납 ()

목차
고대사
인물
당나라에서 청주자사, 조주자사, 절도사 직을 역임한 관인. 고구려유민.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758년
사망 연도
792년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청주자사(靑州刺史)|조주자사(曹州刺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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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당나라에서 청주자사, 조주자사, 절도사 직을 역임한 관인. 고구려유민.
내용

아버지 이정기(李正己)는 765년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전역을 지배하는 평로치청절도관찰사겸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兼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가 되었는데, 그는 젊어서부터 아버지를 도왔으며,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였던 이보신(李寶臣)의 딸과 혼인하여 절도사 간의 동맹체제를 굳히는 데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777년 12월 아버지가 번진(藩鎭)의 치주(治州)를 청주(靑州)에서 운주(鄆州)로 옮김에 따라 그는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임명되었고, 뒤에 조주자사(曹州刺史)로 전임되었다가 781년 8월 아버지가 죽자 이듬해 정식 절도사 자리를 계승하였다.

절도사가 된 직후 조정의 번진제압정책에 대항하여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이희열(李希烈)과 연결, 정부군의 거점인 변주(汴州)를 공격하고 강회(江淮)의 조운선의 북상을 차단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절도사로 있는 동안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켜 통치기반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소금·철·주석·견직물의 생산을 꾀하는 한편, 신라·발해와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서 꾸준히 경제력을 강화해갔다. 그 결과 그의 번진은 당시 여러 번진 중에서 최대의 강성을 자랑하였으며, 조정에 대해서는 거의 독립적인 태도를 취하여 마치 소왕국과 같은 존재로 군림하였다. 792년 5월에 35세로 죽자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뒤를 이어 절도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당대번진(唐代藩鎭)의 한 연구(硏究)-고구려유민(高句麗遺民) 이정기일가(李正己一家)를 중심(中心)으로-」(김문경, 『성곡논총(省谷論叢)』6, 1975 ; 『당(唐) 고구려유민(高句麗遺民)과 신라교민(新羅僑民)』, 일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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