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중(成仲), 호는 극옹(屐翁)·극원(屐園). 이정신(李正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철보(李喆輔)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이복원(李福源)이며, 어머니는 안수곤(安壽坤)의 딸이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부사과를 지냈으며, 1789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직각이 되고 도당록(都堂錄: 홍문관의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선발하기 위해 작성한 의정부의 제2차 추천기록)에 등록되었다.
1795년 대사성으로 규장각제학을 겸했으며, 이듬 해 정리자(整理字) 만드는 일을 감독하였다. 이듬 해 대사간에 이어 1799년 대사성으로 우유선(右諭善)을 겸했고, 1800년 제조·예조판서·검교직제·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지냈다. 이어 공조판서를 거쳐, 순조가 즉위한 뒤 수원부유수가 되어 화령전(華寧殿)을 완성한 공으로 품계가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1801년(순조 1) 판의금부사·대제학·형조판서·병조판서·내각제학(內閣提學)·호조판서를 거쳐, 1803년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04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1806년 함경도관찰사·판의금부사, 1808년 호조판서를 거쳐 1810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치안 유지를 잘못했다는 죄로 이듬 해 파직되고,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곧 사면되어 공조판서·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14년 우빈객(右賓客), 1816년 좌빈객을 거쳐 다음 해 빈객이 되었다. 1819년 예조판서에 이어 1820년 수원유수로 나갔다가 그 해 임지에서 죽었다.
글씨를 잘 써 정주에 「양성기적비(兩聖紀蹟碑)」, 장단(長湍)에 「서명선사제비(徐命善賜祭碑)」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저서로는 『극옹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