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규(聖圭). 이종영(李種永)의 아들로 종정경 이승수(李升洙)에게 입양되어 완원군(完原君) 이유명(李惟命)의 손자가 되었다.
1889년(고종 26) 친림경무대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자마자 승정원우부승지에 파격적으로 임명되었고, 다음해에는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1892년 전라도암행어사가 되어, 백성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는 수령구임법(守令久任法)이 필요하며, 계방촌(契防村)을 혁파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몹시 재물을 탐하고 호기롭던 운봉(雲峰)의 향리출신인 박문달(朴文達)을 잡아 가두고 뇌물을 빼앗으려고도 하였다고 한다.
그해 영선사(領選使)의 후신격인 제2대 주진독리(駐津督理)로 중국 톈진[天津]에 약 반년 동안 파견되었다. 고종은 이면상에게 무기를 비롯한 각종 기계제작술의 학습과 말썽이 되고 있던 청나라 선박의 한강 정기운항의 중지 등을 이홍장(李鴻章)과 상의하고, 또 상해(上海)·북경(北京)의 정세를 염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주진독리였던 덕분에 이면상의 아들이 왕명으로 복시(覆試)의 방말(榜末)에 붙었다. 신식제도를 대폭 채용하고, 불필요한 관원을 대량 퇴직시킨 갑오경장 이후에는 한동안 등용되지 못하다가, 수구파가 정계에 복귀하여 정권을 잡았던 건양·광무 연간에는 많은 구관료들처럼 중추원의관·궁내부특진관·봉상시제조·동지돈녕원사 등 왕실의 전례에 관련된 직책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