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여(成汝), 호는 유형(維馨). 아버지는 이조판서에 증직된 이봉수(李鳳秀)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로 심헌(沈獻)의 딸이다. 작은아버지 이학수(李鶴秀)에게 입양되었다. 가학(家學)을 이어 경사(經史)를 편력하고, 시문에 능통하였다.
1836년(헌종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과·선전관 등 임시직으로 있다가, 생가의 부모가 죽고 양부가 유배 생활을 하는 등 집안의 환란이 계속되자 집에 돌아와 치가(治家)에 힘썼다.
그 뒤 1850년(철종 1) 원릉참봉(元陵參奉)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사옹원과 선공감(繕工監)의 봉사,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한성부주부·의금부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857년 홍문관교리·사간원사간 등을 거쳐 사복시정이 되었으며, 다시 응교·수찬·서학교수(西學敎授) 등을 지냈다. 또한 묘호도감(廟號都監)의 도청(都廳)이 되었다가 통정대부에 승자(陞資)되어 호조참의가 되고, 다시 승정원우부승지가 되었다.
1858년 외직으로 춘천부사로 나갔다가 이듬 해 다시 내직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고, 그 뒤 형조·이조·호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1865년(고종 2) 가족을 데리고 지산(芝山)으로 내려가 은거했으나, 1867년 다시 좌승지에 임명되고 가선대부에 승자되어 예조참판에 승진, 그 뒤 동지경연사·동지춘추관사·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을 지냈다. 1870년 이후부터는 지산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에는 삼정의 문란 등 시폐를 개선하기에 힘썼다.
또한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동서고금의 인물을 독자적인 안목에서 평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저서로는 『유형유고(維馨遺稿)』 6권 3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