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의(全義). 이작(李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의흡(李宜洽)이다. 아버지는 장예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이원효(李元孝)이고, 어머니는 성우(成栩)의 딸이다. 부인은 군수 김약흠(金若欽)과 홍약이(洪若彛)의 딸이다.
1462년(세조 13) 생원시에 합격하고, 1472년(성종 3) 오위의 사맹(司猛)으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예문관봉교(奉敎)에 제수되었다. 1474년 예문관수찬 겸 경연검토관(藝文館修撰兼經筵檢討官)에 승직하고, 다음해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일본을 다녀왔다.
1477년 부교리(副敎理)로서 문과중시에 3등으로 급제하고, 이어 장령(掌令) 재직 중 도승지 현석규(玄碩圭)가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초자(超資)되자 그 불가함을 극간하고 성종의 노여움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곧 서용되었다.
1481년 부응교(副應敎)로서 단송도감(斷訟都監) 낭청에 선임되고, 그 일에 기여한 노고로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면서 집의(執義)에 발탁되고, 1483년에는 직제학(直提學)에 승직되었다.
1484년에는 다시 정3품 통정대부에 오르면서 부제학에 제수되고, 동직 재직 중 병으로 졸하였다. 묘는 경기도 파주시 내율동(內栗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