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태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승문원권지부정자, 홍문관부제학, 경연참찬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시호
문청(文淸)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88년(숙종 14)
사망 연도
1733년(영조 9)
본관
한산(韓山,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
주요 관직
승문원권지부정자|홍문관부제학|경연참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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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승문원권지부정자, 홍문관부제학, 경연참찬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한산(韓山). 아버지는 진사 이협(李浹)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15년(숙종 41) 진사시에 합격하고, 사릉참봉(思陵參奉)·평시서봉사·내자시직장을 역임하였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를 받고, 누진 끝에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수찬에 올랐다.

1727년(영조 3) 예조참의로 있을 때 할아버지가 임진왜란으로 죽었기에, 의당 참의로서 하여야 할 왜서회답(倭書回答)의 예를 회피하기 위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다시 호조참의가 되어, 노론계열로 탕평론을 배척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730년 경상도관찰사에 보직되었으나 거절하고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거절하며, 탕평책을 반대하는 뜻이라고 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합천군수로 좌천되었다.

합천군수 재직 시에 한발로 식량난에 허덕이는 많은 기민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토병(水土病)에 걸려 임지에서 죽었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강한집(江漢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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