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아버지는 진사 이협(李浹)이다.
1715년(숙종 41) 진사시에 합격하고, 사릉참봉(思陵參奉)·평시서봉사·내자시직장을 역임하였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를 받고, 누진 끝에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수찬에 올랐다.
1727년(영조 3) 예조참의로 있을 때 할아버지가 임진왜란으로 죽었기에, 의당 참의로서 하여야 할 왜서회답(倭書回答)의 예를 회피하기 위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다시 호조참의가 되어, 노론계열로 탕평론을 배척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730년 경상도관찰사에 보직되었으나 거절하고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거절하며, 탕평책을 반대하는 뜻이라고 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합천군수로 좌천되었다.
합천군수 재직 시에 한발로 식량난에 허덕이는 많은 기민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토병(水土病)에 걸려 임지에서 죽었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