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이씨, 즉 고구려 유민으로서 평로절도사 검교상서 좌복야(平盧節度使檢校尙書左僕射)를 역임하는 등 당나라 헌종(憲宗) 때에 크게 활약하였다. 할아버지는 평로절도사 수사공 요양군왕(守司空饒陽君王) 이정기(李正己), 아버지는 평로절도사 검교사공(檢校司空) 이납(李納)이다. 평로절도사 검교사도 겸 시중(檢校司徒兼侍中)을 역임한 이사고(李師古)의 이복동생이다.
이사고가 죽은 뒤, 그 후계자로서 이사도를 천거해 조정에 청하였으나 제서(制書)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이는 당시 재상(宰相) 황상(黃常)이 그 권세를 꺾으려 한 것이었다. 이 때 헌종은 유벽(劉闢)을 주살하여 동쪽을 토벌할 겨를이 없어 이사도에게 이 지역에 대한 책임을 맡게 하였으며, 그 해에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를 가하고 부대사(副大使)로 삼았다.
헌종이 채(蔡)땅을 토벌할 때, 이사도는 무리 2,000명을 뽑아 수춘(壽春)땅에 이르게 하였다. 이는 겉으로는 왕의 군대를 도우려 한다고 했으나 실제는 채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헌종에 의해 채가 평정되어 비부원외랑(比部員外郎) 장숙(張宿)을 보내 땅을 나누고 질자(質子)를 보내게 하니, 이사도는 3주를 바치고 아들 홍방(弘方)을 보내 입시하게 하였다. 그런데 휘하 여러 장수들의 만류에 따라 이사도는 군이 불협하여 따르지 못한다고 보고하니, 헌종이 노하여 그 관직을 삭탈하고 여러 군대에게 나아가 치도록 조서를 내렸다.
그리하여 헌종은 819년(헌덕왕 11) 7월에 운주(鄆州 : 지금의 山東省濟寧道)절도사 이사도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 신라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라는 순천군장군(順天軍將軍) 김웅원(金雄元)이 갑병(甲兵)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
한편, 이사도는 자신의 군대가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대장 유오(劉悟)를 보내 치게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유오의 군대가 반란했음을 듣고, 아들 홍방과 함께 숨어 있다가 적군에게 사로잡혀 일생을 마쳤다. 이로써 고구려 유민 출신인 이정기 가문의 4대 60여년 간의 운주 · 조주(曹州) 등 12주에 대한 통치는 이사도 대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사도가 당으로부터 원화(元和) 원년(806) 10월 육운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陸運海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의 관직을 맡은 그해부터 발해(渤海)와 당의 사신 왕래와 교역을 주관했다. 원화 연간(806∼820)에 발해가 당으로 사신을 보낸 것은 총 16회였으므로 연 평균 1회 이상의 사신을 보낸 것이다.
이러한 발해와 당의 빈번한 교류는 당시 당 헌종이 절도사세력의 제압을 위해 발해에 대한 유화책을 썼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중간에서 당과 발해의 교류를 주관하는 이사도와 발해의 관계도 빈번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사도는 독립적인 절도사세력으로서 자신이 관할하고 지역에서 발해와 당의 왕래 루트 중 도리진∼등주(登州)까지의 항로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발해와 당의 빈번한 관계는 이사도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 이유로 인해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건국된 나라에서 당으로 사신을 파견할 때도 이들과의 외교업무는 이사도가 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