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 ()

이상욱
이상욱
회화
인물
해방 이후 「무제」 · 「가로수」 · 「독백」 등을 그린 판화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3년 1월 5일
사망 연도
1988년 4월 5일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함경남도 함흥
정의
해방 이후 「무제」 · 「가로수」 · 「독백」 등을 그린 판화가.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함경남도 함흥 출생이다. 함흥상업학교를 거쳐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東京)의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에서 수학하였다. 동양외국어학교 불어과에서 수학하다가 단국대학 법정과에 입학하여 1952년에 졸업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45년 광복을 함흥에서 맞이하였으나 38선 이북 소련군 점령하의 공산주의 체제가 굳혀져 가자 1947년 남한으로 탈출하여 서울에 정착하였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서양화부에 「장독」과 「누드」가 입선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 발발 그리고 생활고로 인한 중고등학교 미술 교사 생활 등으로 작가 활동이 여의치 못하였다.

그러다가 1957년부터 국전에 다시 참가하였고, 1959년까지 「노방군상(路傍群像)」, 「샘터 있는 마을」, 「해동(解凍)」 등이 연이어 입선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국전을 비롯한 미술계의 모순이 표면화되자 국전 운영의 보수성을 비판하고 불참하였다. 1959년에는 현대적 미술 운동을 표방하였던 신조형파전(新造型派展)에 가담하였다. 1960년부터 1969년 사이에는 조선일보사 현대작가초대전에 참가하여, 심의적인 형상 추구의 추상 작품을 발표하였다. 또한 1958년에는 한국판화협회 결성에 동참하여 판화가로서의 뚜렷한 활약을 보였다.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판화와 유화를 병행하였다.

이상욱의 작품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구체적인 대상이 사라지고 순수한 추상으로 발전하였고 「가로수」(1961), 「독백」(1962)과 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는 신상회전(新象會展)을 중심무대로 활동하면서 「점」 시리즈와 「무제」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은 커다란 원형 또는 사각형의 형태에 획이나 점을 가하는 유형과, 토막진 굵은 붓자국으로 일정한 구성을 시도하는 유형의 두 가지로 나타났다.

1968년에는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고 1970년대에는 석판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이 시기에는 굵은 붓자국을 일정한 토막으로 쌓아가는 선조(線條) 구성이 속도감 있는 띠의 구성으로 변화하면서 서체적(書體的)인 특성을 띠었다. 경쾌하고도 투명한 운필과 색조를 나타내는 작업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1958년 미국 신시내티미술관 국제석판화전, 1972년 이탈리아 국제목판화트리엔날레, 1983년 유고슬라비아 류블랴나 국제판화비엔날레, 1985년 스위스 국제원색판화트리엔날레 등 국제 판화전에 출품하였고, 1970년 동아일보사 주최로 열린 제1회 동아국제판화비엔날레에는 초대작품을 출품하면서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이 밖에도 서울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열면서 많은 판화 작품을 발표하였다.

1966년부터 1978년까지 홍익대학교에, 1968년부터 1979년까지 상명여자대학에 출강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유작초대전』이 열렸으며, 1997년에는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이상욱회고전』이 개최되었다.

참고문헌

『이상욱 1923∼1988』(일민미술관, 1997)
『이상욱』(국립현대미술관,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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