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옥저의 옛 땅이었는데, 고구려 때 시리(時利)라 하였다. 551년(진흥왕 12) 신라의 영토가 되어 이곳에 산성을 쌓고 마운령(摩雲嶺)에는 순수비를 세우고 이곳을 정천질간(井泉叱澗)이라 하였다. 발해 때에는 남경부(南京府)에 속하였고,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오랫동안 여진족의 근거지가 되었다.
고려 성종 때 수복하여 아사현(阿沙縣)이라 하였으며, 그 뒤 다시 여진에게 점유되었다. 1107년(예종 2) 윤관(尹瓘)의 북벌에 의하여 9성을 쌓고 복주(福州: 지금의 단천군)에 소속시켰다가 다시 여진에 돌려주었고, 1258년(고종 45)부터 약 100년간 몽고의 쌍성총관부에 속하였다.
1356년(공민왕 5) 수복하여 복주에 소속시켰으며, 이성보(利城堡)를 두고 통치하다가 1436년(세종 18)단천군의 마운령 이남 및 북청부(北靑府)의 동쪽 다보사(多甫社) 이북의 땅을 분할하여 이성현을 설치하였고, 정조 때 지금의 이름인 이원현(利原縣)으로 고쳤다. 1895년(고종 32) 군으로 승격시켰다.
윤관이 9성을 쌓은 뒤 마운령관(摩雲嶺關)은 해안지방 국경초소의 구실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단천과 남쪽의 북청을 군사ㆍ교통상으로 이어주었다. 성문·진조봉봉수(眞鳥峰烽燧)가 해안지방에 설치되었으며, 보발(步撥)로 나하동(羅下洞)·시리(施利)·곡구(谷口) 등에 참(站)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철이 생산되었다. 명승유적으로는 쌍암해안(雙巖海岸)·한당사(閑堂寺)·반룡사(盤龍寺)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