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권(仲權). 참의 이지직(李之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이다. 아버지는 좌찬성(左贊成) 이극돈(李克墩)이며, 어머니는 예조참판 권지(權至)의 딸이다. 부인은 예천군(蘂川君) 이천(李蒨, 효령대군 증손)의 딸이다.
성종 중기에 문음으로 와서(瓦署)의 별제(別提)에 제수되었다. 이후 장악원주부(掌樂院注簿), 감찰(監察), 사평(司評)을 역임하였다. 1501년(연산군 7) 경력(經歷)으로 식년문과에 삼등과로 급제하고,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역임한 뒤 1503년 통정대부에 오르면서 병조참지에 제수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사사(賜死)된 이극균(李克均)의 조카라 하여 남해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사면과 함께 예조참의에 서용되고, 곧 병조참지에 체직되었다.
1507년 노모 봉양과 관련되어 광주목사(光州牧使)에 파견된 뒤 이듬해 판결사(判決事)로 중앙으로 돌아 왔다. 이후 1523년까지 형조참의, 병조참의, 전주부윤, 예조참의, 해주목사, 돈령부도정, 판결사, 전라도관찰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두루 역임하였다.
1524년(중종 19) 좌승지에 제수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가 출납을 소홀히 한 일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듬해 호조참의에 서용되고, 다음해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1528년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졸하였다. 청렴강개한 성품과 효행으로 인망이 높았다. 묘는 경기도 성남시 하대원동(下大院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