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정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첨지중추부사, 좌승지, 이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중권(仲權)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61년(세조 7)
사망 연도
1528년(중종 23)
본관
광주(廣州)
주요 관직
형조참의|병조참의|전주부윤|이조참의
관련 사건
갑자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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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첨지중추부사, 좌승지, 이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권(仲權). 참의 이지직(李之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이다. 아버지는 좌찬성(左贊成) 이극돈(李克墩)이며, 어머니는 예조참판 권지(權至)의 딸이다. 부인은 예천군(蘂川君) 이천(李蒨, 효령대군 증손)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성종 중기에 문음으로 와서(瓦署)의 별제(別提)에 제수되었다. 이후 장악원주부(掌樂院注簿), 감찰(監察), 사평(司評)을 역임하였다. 1501년(연산군 7) 경력(經歷)으로 식년문과에 삼등과로 급제하고,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역임한 뒤 1503년 통정대부에 오르면서 병조참지에 제수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사사(賜死)된 이극균(李克均)의 조카라 하여 남해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사면과 함께 예조참의에 서용되고, 곧 병조참지에 체직되었다.

1507년 노모 봉양과 관련되어 광주목사(光州牧使)에 파견된 뒤 이듬해 판결사(判決事)로 중앙으로 돌아 왔다. 이후 1523년까지 형조참의, 병조참의, 전주부윤, 예조참의, 해주목사, 돈령부도정, 판결사, 전라도관찰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두루 역임하였다.

1524년(중종 19) 좌승지에 제수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가 출납을 소홀히 한 일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듬해 호조참의에 서용되고, 다음해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1528년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졸하였다. 청렴강개한 성품과 효행으로 인망이 높았다. 묘는 경기도 성남시 하대원동(下大院洞)에 있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광주이씨대동보(廣州李氏大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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