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봉산(鳳山). 봉산이씨의 시조. 자는 택지(擇之), 호는 심은(深隱) 또는 관곡(寬谷).
1396년(태조 5) 생원시에 제1위로 합격하였으며, 1410년(태종 10) 왕이 경명행수(經明行修)한 사람을 구할 때, 대사성 유백순(柳伯淳)의 천거로 뽑혔으나 사퇴하였다.
이듬해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가 소명(召命)을 전하자 상경하여 여러 왕자의 교육을 맡아보았다. 1412년 종묘서주부(宗廟署主簿)를 지내고, 1414년 왕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취사(取士)할 때, 제4위로 급제, 전사주부(典祀主簿)·공조정랑·예조정랑을 역임하고, 1417년 전사소윤(典祀少尹)을 지냈다.
이듬해 세종이 즉위하자 사재감정(司宰監正)·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1422년(세종 4)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고부부사(告訃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3년 예문관제학·이조참판, 1425년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참찬의정부사를 역임하였다.
1427년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고, 1429년 예문관대제학·이조판서에 재등용되고, 이듬해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취중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