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수안(遂安)이다. 1342년(충혜 복위 3) 정월 총관(總管)으로서 청교역(靑郊驛)에서 왕과 함께 경마하였으며, 밀직부사에 올라 추성익대좌명공신(推誠翊戴佐命功臣)이 되고, 춘성군(春城君)에 봉하여졌다. 1347년(충목 3) 7월 강윤충(康允忠)의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업무 방해를 고용보(高龍普)에게 알리기도 하였고, 10월 행성낭중(行省郎中)으로 원에 가서 동녀(童女)를 바쳤다.
1352년(공민 1) 조일신(趙日新)의 난 때 종적을 감추어 죽음을 면하였고, 1354년 6월 첨의평리를 거쳐 찬성사에 올랐다. 1355년 12월 행성낭중으로 쌍성에 가서 이주민과 원거주민을 구별하여 호적을 작성하였는데, 이를 삼성조감호계(三省照勘戶計)라 하였다. 1356년 행성낭중(行省郎中)이 되어 친원파 기철(奇轍)이 포살되자 그 일파로 유배되었으나 1362년(공민 11) 12월 수춘군(壽春君)으로서 동북면도순문사로 나가 여진족을 평정하여 경계를 정하였다. 1365년 삼사우사(三司右使),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6월 수춘부원군(壽春府院君)이 되고, 추충보절익대좌리공신(推忠保節翊戴佐理功臣)에 봉해졌다. 이해 권세를 잡은 신돈(辛旽)에 의하여 한때 숙청당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자 우왕을 즉위시키려는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의견에 판삼사사로서 혼자 그 부당성을 지적, 종친 가운데에서 후계자를 뽑자고 주장하였으며, 1376년(우왕 2) 11월 춘성군(春城君)으로 세상을 떠났다. 1390년(공양 2) 2월 좌상시 윤소종(尹紹宗) 등의 건의에 의해 공양왕이 그 충의를 표창하고 그 묘에 제사를 올리고 자손들을 등용하였다. 시호는 공량(恭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