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미숙(美叔), 호는 농계(聾溪)·취몽헌(醉夢軒). 관찰사 이동직(李東稷)의 아들이며,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14세에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 1660년(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69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의 벼슬을 거쳐 정언·지평을 역임하고 1681년(숙종 7) 응교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특진된 뒤 승지·대사간·대사헌 등을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초산(楚山)에 유배되었다가 1694년 갑술옥사로 풀려나와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대사헌으로 오도일(吳道一)을 탄핵하다가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내직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청주에 내려갔다.
그 뒤 예조판서를 비롯하여 판윤·참찬·지중추부사 등의 벼슬로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김창협(金昌協)은 이수언의 용퇴와 지조를 높이 칭찬하였다 한다. 청주의 국계사(菊溪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간(正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