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복 ()

이승복
이승복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신간회 선전부 총무간사, 조선일보 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 ·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5년(고종 32)
사망 연도
1978년 10월 31일
출생지
충청남도 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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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신간회 선전부 총무간사, 조선일보 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 · 독립운동가.
개설

초명은 이징복(李徵馥), 호는 평주(平洲). 충청남도 예산 출신. 대한제국 말 애국지사 이남규(李南珪)의 손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장통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그리고 남궁억이 교장으로 있던 청년학원(靑年學院)에서 수학하였다.

이 무렵부터 장지영(張志暎)·강매(姜邁) 등에게 독립운동을 권유받고, 형 이민복(李敏馥)과 함께 노령으로 망명하였다. 1913∼1919년에 노령과 북만주에서 이동녕·이회영·이시영·이상설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20년에는 노령에서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청구신문(靑丘新聞)』을 발간했으며, 신문활자를 노령으로 운반한 일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구금당하였다. 동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박용만(朴容萬)·이민복·조성환(曺成煥) 등이 조직한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지원하기 위해 김병희와 함께 귀국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1921년에는 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의 국내 조직을 결성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1923년 1월 귀국했다가 김상옥(金相玉)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파 의거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동년 7월 홍명희(洪命熹)·홍증식(洪增植)·김찬(金燦) 등과 함께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를 조직하고 조직간사로 활동하였다.

정우회(政友會)에 가담해 1926년 11월에는 연구부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그 해 말 정우회 선언에 따라 민족협동전선운동이 전개되자, 1927년 1월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동년 2월 신간회 창립대회에서 선전부 총무간사에 선임되었다. 아울러, 1927년 11월 이관용(李灌鎔)·권태석(權泰錫) 등과 신간회 충남 예산지회를 설립하고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갔다.

1927∼1933년에는 조선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며 언론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에 힘썼다. 1928년 6월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의 정기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족교육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1932년 안재홍(安在鴻) 등과 재만동포 구호활동을 벌이다가 일제의 구호금 소비 조작으로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6년 3월에는 여운형의 도움을 받아 중국 항주(杭州)에 있는 항공학교를 졸업하고 남경·상해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하려던 정필성(鄭必成)을 중국으로 망명케 하였다. 1945년 3월 일본헌병사령부의 예비검속으로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건국준비위원회(大韓民國建國準備委員會)의 교통부장에 선임되었으나 고사(固辭)하였고, 1946년 국민당(國民黨) 총무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동년 국민당이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자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8년 신한국민당(新韓國民黨)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한편,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민주일보사의 부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51년 낙향해 한학 연구와 농업에 종사하였다. 1978년 10월 31일 서울에서 서거했다.

상훈과 추모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에 있다. 1980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유공자공훈록』7(국가보훈처, 1990)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준엽·김창순, 청계연구소, 1986)
『삼천백일홍』(평주이승복선생망구송수기념회 편, 인물연구소, 1974)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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