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보여(葆汝). 좌의정 이행(李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추원부사 이원상(李元祥)이다. 아버지는 전라도도순찰사 이광(李洸)이며, 어머니는 공조판서 이증영(李增榮)의 딸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에 합격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의 옥사와 폐모론이 일어났으나 이를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때 성균관유생 300여 명을 이끌고 궐문에 나아가 항소하였다. 또한, 1618년 동학유생 조경기(趙慶起)·권심(權淰)·정복형(鄭復亨)·심지한(沈之漢)·구방(具枋)·노원범(盧元範)·이원충(李元忠) 등과 함께 폐모론을 주동한 정조(鄭造)·윤인(尹訒)·이위경(李偉卿) 등의 목베기를 청하는 소를 올렸다.
그러나 왕의 노여움을 사서 상소에 참여한 21명과 함께 유적(儒籍)에서 삭제당하고, 금고형에 성문 밖으로 쫓겨났다가 귀양갔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의 주청으로 같이 죄를 입었던 동학유생들과 함께 6품직에 발탁되었으며, 이어 청양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공조좌랑·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을 거쳐 1635년(인조 13) 한산군수, 1639년 한성서윤을 역임하였다. 성품은 효우(孝友)가 돈독하고 언소(言笑)를 잊지 않았으며, 바른 행의(行義)가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공사에서는 매사 염정(廉靜)하고 엄하여 위엄을 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