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신경(信卿). 이명희(李命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후(李후)이다. 아버지는 이도양(李度陽)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로 예조참판을 지낸 박사정(朴師正)의 딸이다. 부인은 심전(沈錪)의 딸이다.
1769년(영조 45)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간원정언, 홍문관교리·수찬 등을 지냈다. 1772년 봉조하 남태저(南泰著)에게 선마(宣麻: 임금이 신하에게 几杖을 내릴 때 함께 끼워서 주는 글)하는 의식에서 선교관(宣敎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대령하지 않아 변방의 권관(權管)으로 좌천되었다.
1773년(영조 49) 도승지로 승진하고, 대사간·대사헌, 비변사당상 등을 거쳐, 1775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뇌물죄의 보고를 여러 달 지체시킨 일로 파직되었다.
다음해 동지 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의 부사로 북경에 파견되어, 홍인한(洪麟漢)·윤양후(尹養厚)·윤태연(尹泰淵)·홍지해(洪趾海)·홍술해(洪述海) 등의 역모 토벌을 아뢰고, 다음해 3월 돌아와 중국에서 견문한 내용을 조정에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어 대사헌·도승지, 예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오랫동안 대사헌에 재직하면서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채홍리(蔡弘履) 등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1783년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에게 호를 올리는 존호도감의 제조가 되고, 그 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다음해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우참찬, 형조판서를 거쳐 1785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좌참찬, 예조판서·공조판서·병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등을 두루 거쳤다. 병조판서 때 무관의 인사행정 규례를 변통한 것이 많았다. 1790년에는 관직 제수에 응하지 않은 죄로 청주목사에 좌천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수십 차례 이조·병조를 비롯한 육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했으나, 정승에는 오르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