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성여(聖與), 호는 동암(東巖). 할아버지는 퇴계 이황(李滉)이고, 아버지는 군기시첨정 이준(李寯)이며, 어머니는 훈도 금재(琴梓)의 딸이다.
음보(蔭補)로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을 거쳐 제용감봉사(濟用監奉事)를 역임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안동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웠다. 이듬해 연원도찰방으로 나가 전쟁의 재해를 입은 백성들의 구호와 군량미를 조달하여 명관으로 이름을 떨쳤고, 1594년 충청도판관을 겸직, 피난민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여 전란중에서도 수만 석의 양곡을 생산하였다.
1596년 한때 좌천당하였다가 유성룡(柳成龍)의 상소로 복직된 뒤,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사를 따라 많은 군량미를 조달, 수송하여, 그 공으로 1597년 호조좌랑이 되고 다시 호조정랑이 되어 남정양향사(南征糧餉使)로서 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현풍현감이 되어 치적이 뛰어나서 표리(表裏: 옷감의 안팎감)가 하사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김제군수에 승진되고, 4년 후에는 청송부사에 승진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사복시첨정·군기시부정·영천군수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익산군수를 거쳐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내섬시정·원주목사를 역임하고, 1636년 군기감정에 올랐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되었으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