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사윤(士潤), 호는 석당(石塘). 가계와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753년(영조 29) 종묘제사에 궁위령(宮闈令)으로서 참여하였고 그 공으로 품계가 승진되었다고 한다. 유재건(劉在建)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는 그가 그림을 잘 그렸고 돌을 좋아하는 성품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느 해 정초에 신위(申緯)의 집에 세배를 갔다가 그곳에서 돌을 얻고 기뻐하였는데 그 때 이미 백발의 노인이었다고 전한다. 이 내용에 의하면 그는 신위보다 나이가 위였지만 신분상으로 낮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문예에 뛰어났으나 신분이 높지 않았던 인물들의 전기를 모은 『이향견문록』에 실렸던 점으로 보아 중인계층의 화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산수화로서, 물기 머금은 윤필(潤筆)로 다루어진 소략한 형태와 밝고 투명하게 선염된 고운 담채가 특징을 이룬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조선 말기에 대두되는 이색적인 화풍과 상통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동산방화랑 소장의 화첩에 들어 있는 「포동춘지(浦洞春池)」, 「가헌관매(可軒觀梅)」, 「귤헌납량(橘軒納凉)」, 「행정추상(杏亭秋賞)」 등 4폭의 그림과 개인 소장의 「양류노주도(楊柳鷺舟圖)」에 참신한 화면을 이룩하였던 그의 회화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이밖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운산도(雲山圖)」, 개인 소장의 「추경산수도」 등이 유작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