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觀) 또는 보산자(寶山子). 이경여(李敬輿)의 현손이다.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낳은 명문 출신으로 1735년(영조 11) 진사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증조부 이민계(李敏啓)가 서자였기 때문에 본과에 이르지 못하였다. 음보(蔭補 :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로 북부 참봉(北部參奉)이 되고, 음죽 현감, 지리산 사근역(沙斤驛) 찰방을 지냈다.
몸이 쇠약하여 관직에 있는 동안에도 가슴앓이로 고생하며 지냈다.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으로 탐관오리의 부정을 참지 못하였다. 끝내는 관찰사와 다툰 뒤 관직을 버리고 평소 좋아하던 단양에 은거하여 벗들과 시·서·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서출이었지만 명문 출신답게 시문과 학식이 뛰어나 당시 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후대의 문인과 서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학통은 김창흡(金昌翕)과 이재(李縡)로 이어지는 이기절충론(理氣折衷論)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이윤영(李胤永), 송문흠(宋文欽), 황경원(黃景源), 오재순(吳載純), 윤심형(尹心衡), 김무택(金茂澤) 등과 가까이 지냈다. 증조부가 서자인 까닭에 신분적 약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러한 약점으로 인하여 숭명배청이라는 보수적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였다. 대표작 「검선도(劍僊圖)」는 서얼 출신의 불우한 심리를 표출한 작품으로 해석된다.
글씨 중 해서체는 안진경(顔眞卿)을 따랐다. 전서체는 마음 내키는 대로 호기 있게 써서, 당시에도 기(奇)하다고 하고 혹은 허(虛)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정희(金正喜)는 그 문자향을 높이 평가하면서 “전각은 200년 이래로 따를 자가 없다.”고 상찬하였다.
유품으로는 『원령첩(元靈帖)』(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능호첩(凌壺帖)』(개인 소장)이 전한다. 당시 서예가들에 비해 고전(古篆)을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당나라 이양빙(李陽氷) 서풍의 소전(小篆)과 한비(漢碑)에 근간을 둔 예서(隸書)에도 뛰어났다. 자신의 마음을 담박하고 졸박하게 글씨로 형상화했다고 평가된다.
그림은 그의 곧은 지조와 강개한 성격이 그대로 반영되어 담백하면서도 투명한 색감과 깔끔한 멋과 함께 단엄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소나무와 바위라는 문인적 소재를 즐겨 그렸다. 유전하는 작품으로는 「송하독좌(松下獨坐)」(개인 소장), 「수석도(樹石圖)」, 「설송도(雪松圖)」,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검선도(劍僊圖)」(이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하한담도(樹下閑談圖)」, 「강상초루도(江上草樓圖)」(이상 개인 소장) 등이 있다. 사인풍(士人風)의 풍속화로는 「송하수업도(松下授業圖)」(개인 소장), 진경산수도는 금강산을 그린 「옥류동(玉流洞)」, 「은선대(隱仙臺)」(이상 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화법은 엷은 먹으로 바림을 하고 농묵(濃墨 : 짙은 먹)으로 굴곡과 윤곽을 짓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예서체를 응용한 필법을 특기로 하였다. 사승(師承 : 스승에 학문이나 기술 따위를 배워서 이어받음)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을 통해 그림을 배웠다. 그의 작품에서는 17세기 중국 안휘파(安徽派)의 영향이 뚜렷이 보인다.
당대의 이윤영(李胤永), 후대의 윤제홍(尹濟弘)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정수영(鄭遂永), 이재관(李在寬), 김수철(金秀哲), 김창수(金昌秀) 등의 화풍도 이에 연결되어 조선 후기 문인화풍의 한 맥을 형성하였다.
행장은 오희상(吳熙常)이 적었으며, 문집인 『능호집』의 발문은 김종수(金鍾秀)가 썼다. 최근 그의 문집 초고인 『뇌상관집』이 발견되어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더욱 상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