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중경(重卿). 1558년(명종 13) 무과에 급제해 경성판관 등을 거쳐 1583년(선조 16) 전라좌수사 · 경원부사를 지냈다.
1587년 함경도북병사가 되어 이탕개(尼湯介)의 난을 평정하고, 녹둔도(鹿屯島)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이듬해 두만강을 건너 여진의 시전부락(時錢部落)을 소탕해 가옥 200여 동(棟)을 불사르고, 여진족 380여 명을 목베는 전과를 올렸다. 1589년 전라병사가 되어 신립(申砬) · 정언신(鄭彦信) 등과 변방의 군비 상황을 의논하였다.
1592년 4월 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순변사가 되어 북상하는 왜적을 상주에서 맞아 싸우다가 크게 패배하고 충주로 후퇴하였다. 충주에서 도순변사 신립의 진영에 들어가 재차 왜적과 싸웠으나 패하고, 사잇길로 도망해 황해 · 평안도로 피하였다.
이 때 세자 광해군을 3,000명의 군사로 시위하다가 평양 왕성탄전투(王城灘戰鬪)에서 왜적 80여 명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패주한 죄가 큰 것을 들어 처벌을 요청하는 신하도 있었으나, 경험이 많은 무장이라 해 용서하였다.
그 뒤 지중추부사 · 비변사당상 · 훈련원지사를 지내면서 군사들을 조련시켰으며, 한양이 수복되자 우변포도대장이 되어 난리를 치른 수도의 치안 유지에 힘썼다. 또한 충청도에서 송유진(宋儒眞) 등의 난이 일어나자 순변사로 뒷수습을 맡았다.
1595년 왕의 특지로 다시 함경도북병사가 되고, 지중추부사 · 행호군을 거쳐 함경도남병사가 되었다. 1601년 부하를 죽였다는 살인죄의 혐의를 받고 붙잡혀 호송되다가 정평에서 죽었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장양(壯襄)이다. 저서로는 『증보제승방략(增補制勝方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