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1년(성종 12) 진사로서 벼슬을 구하기 위하여 시무책(時務策)을 상소하고, 그 문장이 탁월하다 하여 선전관(宣傳官)에 기용되었다.
1485년 정언(正言)에 제수되고, 곧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체직되면서 정희왕후(貞熹王后, 세조비)의 신주를 종묘에 안치할 때 그 실무를 담당하고 봉훈랑(奉訓郞)에 승진하였다.
1489년 남원도호부판관 재직 중 예조정랑에 발령되었다가 곧 공조정랑에 개수(改授)되자, 머뭇거리다가는 다시 한직으로 밀릴 것을 두려워하여 후임자에게 사무인계를 하지 않고 무단히 상경한 일로 파직되면서 고신(告身: 관직 임명 사령장)을 몰수당하였다.
1490년 직첩을 환급받고, 다음해에 서용되었다. 이 때 대간으로부터 “파직된 지 오래지 않았는데 서용함이 불가하다.”는 논핵이 있었으나 성종의 옹호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5월 정4품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오르면서 행지평(行持平)에 제수되고, 이어 정언과 형조정랑을 거쳐 1492년 첨정(僉正)에 승직하였다.
1495년(연산군 1) 사헌부 겸장령(兼掌令)으로서 영안도 반고경차관(反庫敬差官)으로 파견되어 민정을 탐문하던 중 이시애여당(李施愛餘黨)을 포착하여 추국하였는데, 그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짐에 따라 파직되었다.
곧 서반 5품직에 서용되고, 동반 4품직에 승직하였다가 퇴직하였다. 1505년(연산군 11) 아들 이번(李蕃) 등의 상소로 서용이 논의되기도 하나 실현을 보지 못하고 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