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수(子修), 호는 서곡(西谷). 이수광(李秀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유간(李惟侃)이다. 아버지는 호조판서 이경직(李景稷)이며, 어머니는 첨지 오경지(吳景智)의 딸이다.
1636년(인조 1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가 심양(瀋陽)으로 갈 때 사서로 시종했으며 귀국해 정언·수찬·응교·검열·대교·봉교·전적을 역임하였다. 1642년 예조좌랑을 거쳐 1649년 효종이 즉위한 뒤 다시 정언·교리·헌납 등을 지냈다.
1657년(효종 8) 종부시정·사인·사간을 거쳐 1659년 병조참의·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부총관·병조참판·대사간을 거쳐 1664년 평안도관찰사를 지내고, 1666년 예조참판, 이듬해 도승지에 이어 판윤이 되었다. 1669년 우윤으로 보전문서사관(寶篆文書寫官)이 되었으며, 1671년 개성유수를 지냈다.
이듬해 1672년 한성부판윤으로 다시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산릉도감제조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1677년(숙종 3) 형조판서 때 시관으로서 부정을 저질러 철원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이어 판돈녕부사가 되고, 1685년 판의금을 거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전서(篆書)와 주서(籒書: 漢字의 옛 字體의 하나. 보통 大篆이라고 함.)에 뛰어났으며, 글씨로는 「민기신도비(閔箕神道碑)」·「이순신명량대첩비(李舜臣鳴梁大捷碑)」·「영안위홍주원비(永安尉洪柱元碑)」·「호판이경직비(戶判李景稷碑)」·「판추김시양비(判樞金時讓碑)」·「감사강홍중비(監司姜弘重碑)」·「형참이소한비(刑參李昭漢碑)」·「정여창비(鄭汝昌碑)」·「예참홍주국비(禮參洪柱國碑)」 등 다수가 있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