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주(仁州)이다. 이예(李預)의 손자이며, 시중을 지낸 이공수(李公壽)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고, 문장에 능하여 글을 지을 때에는 미리 지어둔 것과 같았다고 한다. 1120년(예종 15)에 장원으로 과거에 급제한 뒤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인종 초에는 우정언에 임명되어 지론(持論)이 공정하였으나, 재상의 비위를 거슬러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옮겨졌다가 서해도안찰사로 나갔다.
이자겸이 정권을 잡자 이를 노려 많은 무리들이 다투어 붙었으나, 이지저는 친족이면서도 상종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자겸의 사자들이 주군(州郡)에서 뇌물을 받아들이므로 이를 금하다가 미움을 받아 지평주군사(知平州郡事)로 좌천되었다. 이자겸이 물러나자 기거주(起居注)가 되었다.
또한,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 등과는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여 금나라에 대하여 신중론을 폈다. 왕이 이를 옳게 여겨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임명하였고, 1135년(인종 13)에 묘청 등이 난을 일으키자 인종에게 건의하여 문공인(文公仁)·임경청(林景淸) 등을 파면시켰다.
이듬해 좌승선으로 서경을 초유(招諭)하였다. 1138년 추밀원부사가 되고, 이어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御史大夫同知樞密院事), 추밀원사로 승진되었으며, 동지공거가 되어 이대유(李大有) 등 29인을 뽑았다.
1140년 예부상서가 되었고, 1141년 정당문학 판한림원사(政堂文學判翰林院事)가 되었다. 1142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에 오르고, 1143년에는 참지정사 판서경유수사(參知政事判西京留守事)를 지냈다. 1145년에 정당문학 참지정사로 재직할 때 죽었다. 중서시랑평장사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