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강원도 횡성에서 출생하였다. 춘천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2년부터 2년간 일본 도쿄의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이어서 1934년 분카학원(文化學院) 본과 미술부에 진학하여 1937년에 졸업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풍부한 색감의 다분히 표현주의적인 정물화와 풍경화가 거듭 입선하면서 양화계에 진출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의 미술학교 유학생들의 조직이던 재동경미술가협회(在東京美術家協會) 서울전에도 참가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조선미술건설본부 결성에 참여하였고,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등과는 거리를 두면서 화가로서의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이 시기의 활동은 주로 학교 미술실에서 과일이나 꽃 등의 수채화와 유화 소품을 그리는 정도에 머물렀다. 그러나 1951년에 제작한 「학살」은 무고한 양민의 살육현장을 그려 6․25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1954년 김종하(金鍾夏)·변희천(邊熙天)과의 3인전을 계기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1958년부터 1959년까지 ‘한국의 바우하우스 운동’을 표방한 신조형파전(新造型派展)에 참가하였고, 이 무렵부터 추상표현주의의 작품세계로 전향하였다. 또,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 추상작품들을 출품하였고, 1962년부터 1969년까지는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들이 조직한 신기회전(新紀會展)에만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이듬해 작고하였다.
1970년에 1주기 추모전 「이철이․이상우 유작전」이 국립공보관화랑에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