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 8책. 활자본. 원집 8권과 부록 6권으로 되어 있다. 1795년(정조 19)에 왕명으로 교서관(校書館)에 이를 관장할 국(局)을 설치하고, 이순신의 유고와 관계 문건을 망라해 규장각검서 유득공(柳得恭)과 규장각(奎章閣) 문신(文臣)인 윤행임(尹行恁) 등의 감독·지휘 아래 편집, 간행되었다.
이본으로 1918년최남선(崔南善)이 구두점을 찍고 신문관(新文館)에서 2책으로 출간한 것이 있다. 이외에 1931년서장석(徐長錫) 등이 6책으로 중간한 바 있으나 이것은 활자를 쓴 탓으로 오식(誤植)이 많다.
1984년 아세아문화사(亞細亞文化社)에서 임진왜란 관계문헌 총간 1호로 『지천집(芝川集)』·『오음유고(梧陰遺稿)』·『천곡집(泉谷集)』 등과 합책으로 영인, 출간하였다.
책머리에는 통영에 충렬사(忠烈祠)를 세워 향배하고 전서를 각각 인장(印藏)하게 하며 치제(致祭)하는 등의 조처를 취할 때에 내린 윤음(綸音: 李秉模書), 그리고 정조 어제(御製)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이 각각 판각되어 있다. 또한, 총목(總目)과 각 권마다 개별 목록을 수록하였다.
권수(卷首)의 첫머리에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활약할 당시의 교유(敎諭) 17편, 죽은 뒤에 내린 역대의 사제문(賜祭文) 12편, 기(旗)·곡나팔(曲喇叭)·구선(龜船) 등의 도설, 그리고 이순신의 세보와 연표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2건의 귀선도(龜船圖)는 귀선의 장척(長尺) 및 모형을 알려주는 전형(典型)이 되고 있다.
권1은 시 5편, 잡저 10편, 권2∼4는 장계(狀啓) 65편, 권5∼8은 난중일기(亂中日記), 권 9∼12는 부록으로 종자(從子) 분(芬)이 쓴 행록을 비롯해 이순신의 비문·기문(記文)·제문 및 송명(頌銘) 등을 한데 모았다.
권13·14는 기실(紀實) 상·하로 국내외 전적에서 이순신에 관한 기록을 뽑아 모은 것이다. 끝에는 왕명으로 내각(內閣)에서 편집하고 내탕전(內帑錢)과 어영전(御營錢)을 내려 그 경비를 충당한 내역 및 전서를 보내 수장한 곳을 적은 간기(刊記)가 있다.
시는 5편에 불과하지만 모두가 감동을 주며 시작의 우수성이나 이순신의 우국충정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잡저 중에 서(書)는 시사(時事)에 관한 내용도 담고 있다. 장계의 내용은 모두 임진왜란과 관계된 것으로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왜란이 일어나자 이를 조정에 보고하고 그 대비책을 건의한 것, 왜병을 이끌고 다른 지역에 출병한 것, 옥포해전(玉浦海戰)을 비롯해 각처에서 왜병을 격파한 것, 유황과 화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한 것, 포로로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이나 포로가 된 왜병으로부터 얻은 적의 정황 등이 있다.
이외에 연해의 군사와 양기(糧器)를 주사(舟師)에게 배속시켜 주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말 것, 군량미 마련을 위한 둔전(屯田) 설치, 주사에게 소속된 고을의 수령은 주사의 지휘를 받고 전투에 임하며 해당 지역의 사람은 수군으로 해전에만 임하게 할 것 등이 수록되었다.
또한 수사에게 적합하다고 인정되는 자를 휘하에 두게 하고 종사관(從事官)은 문신으로 삼아줄 것, 진중시재(陣中試才)를 허락해 줄 것, 의병제장(義兵諸將)과 공이 있는 자를 포상해 줄 것, 의원을 파송해 질역(疾疫)을 치유해 줄 것, 왜병에게 빼앗은 조총을 조정에 바친 것 등이 주가 된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왜란 중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날의 일기와 왜병과의 전투상황 및 원균(元均)과의 교섭 등 본인의 활동은 물론 주변 수군의 상황까지 망라해 기술하고 있다. 일기에는 그가 백의종군할 때의 기록이 빠져 있고, 일기 가운데도 간혹 누락된 월·일·자가 보이기도 하지만 이 전서의 중심을 이룬다.
기실 상하에 기록된 국내외 이순신에 관한 기록은 그에 대한 행적만이 아니라, 일화·인품·전언(傳言) 등을 총망라한 것으로 거의 완벽한 수집이다.
이 전서는 왕명을 받고 국가적인 사업으로 완성한 만큼 조선시대 출판문화에 있어서도 하나의 표본이 되는 전적(典籍)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순신 개인의 전기(傳記) 자료로서 충분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사 연구에 빠질 수 없는 귀중한 문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