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재대(載大), 호는 담헌(澹軒) 또는 계림(鷄林).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의 손자이며, 당시 문형(文衡)이었던 이인엽(李寅燁)의 맏아들이다.
1708년(숙종 34) 진사에 올라 정7품직인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와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인 진천에 내려가 학문과 서화에 힘썼으며 장서가 1만권을 헤아렸다. 성격이 곧아 아첨하기 싫어하고 여행을 좋아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여행하였으며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각 사찰과 암자를 찾아다녔다.
그의 교유관계 중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이병연(李秉淵)과 서예와 문장으로 유명한 윤순(尹淳), 화가였던 정선(鄭敾)과 윤두서(尹斗緖)와의 교유는 특히 주목된다. 특히 그의 문집 중에 윤두서의 「자화상」과 『공재화첩』에 대한 기록, 정선의 여러 그림에 대한 화평, 당대 및 중국의 화가들에 대한 평 등이 있어 평론가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유작 중 「춘경산수도」(간송미술관 소장)는 복사꽃이 핀 봄풍경을 연두와 분홍의 담채를 써서 묘사한 것으로, 필치는 세련되지 않으나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을 보이며 정선의 초기 작품과 연관을 보여준다. 이밖에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전한다. 문집으로는 『두타초(頭陀草)』18권이 있다.